더피알=신아연 객원기자 |
정현종 시인의 시 ‘비스듬히’를 어딘가에 비스듬히 기댄 채 읊어본다.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생명, 너남 없이 누군가의, 무엇의 덕분에 살아가는 우리 생명들.
척박한 환경과 불확실한 미래지만 그래도 희망을 품을 수 있고, 꿈을 이뤄볼 마음을 내는 것은, 즉 생명 본연의 모습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서로서로 기대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탁자의 모서리처럼 어딘가에도, 무엇에도, 누군가에도 기댈 수 없는 사람은 결국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사람 인(人)’자가 그렇지 않나. 서로 비스듬히 기대있는 형상, 그게 사람의 원래 모습이라며, 사람은 그래야 살 수 있다며 사람 인(人)자는 서로 기대라고 격려한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서로 기댈 줄을 모른다. 엄밀히는 ‘비스듬히’ 기댈 줄을 모른다. 아예 타인에게 포개지려고 하거나, 아니면 이를 응등물고 혼자 버티려고 한다. 둘 다 잘못되었다.
생명에 반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사람 본연의 모습으로 성장할 수 없다.
나무들조차 공기에 기대어 서 있다고 하는 시인의 기가 막힌 발견에 아득해진다.
흔히 우리는 혼자 고고한, 꼿꼿한, 독립성, 주체성의 상징으로 나무를 꼽곤 하지만 나무 또한 공기에 기대고 있다는 말에 한 대 맞은 듯한 안도를 느낀다. 무릇 생명이란 모두 기대고 살아감을 확인하는 안도감.
중요한 것은 ‘비스듬히’ 기대는 데 있다. 나의 주체성을 잃지 않고 타인의 주체성을 침해하지 않는, 무게 중심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에게 있기에 주어진 내 길, 내 삶, 내 꿈을 향한 발걸음을 결코 상실하거나 비틀거리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나란 존재가 누군가에게, 그 무엇에 완전히 기생하거나 포개지거나 뭉개져버릴 때, 즉 ‘비스듬히’를 포기할 때 다른 ‘비스듬히’조차 존재를 위협받으면서 생명이 붕괴되는 도미노 현상이 생기고 만다.
나는 다른 누군가에게 기꺼이 ‘비스듬히’가 되어주고 있는지, 나 또한 다른 ‘비스듬히’에 흔쾌히 기대고 있는지, 그리하여 서로서로 생명 성장을 이뤄가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