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피알=박주범 | 하루 24시간의 일상이 (당사자 모르게) 전세계 시청자들에게 리얼리티쇼와 광고로 생중계 되고 있었다는, 당시로서는 매우 기발한 소재의 영화 ‘트루먼쇼’가 나온 것이 1998년이다.
타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것을 즐기고 사이사이 등장하는 제품에 관심을 갖는 인간의 특성을 일찍이 간파한 이 영화 속 주인공은 마침내 진짜 인생을 찾아 탈출하지만, 오늘날 SNS 세대는 너도나도 자신의 일상을 담은 영상을 공유하며 브랜드 파트너십을 꿈꾼다.
SNS 이용자나 인플루언서들이 만드는 ‘GRWM(Get Ready With Me, 나랑 같이 준비해)’ 영상의 스토리라인에는 피부 관리, 메이크업, 머리스타일 등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모든 행동은 물론, 삶이나 사랑에 관한 개인적 이야기도 포함된다.
글로벌뉴스통신사 AP는 GRWM 영상이 넘쳐나는 트렌드에 대해 보도한 11월 26일자 기사에서 이런 류의 영상이 지난 10년간 인기를 얻어온 “with me(나와 함께)” 형식 콘텐츠의 일부라고 분석했다.
‘with me’ 콘텐츠 중에는 크리에이터가 영감이나 즐거움을 위해 집을 청소하는 모습을 담은 ‘Clean with Me’ 또는 시험에 대비해 벼락치기 공부를 하는 내용을 담은 몇 시간 분량의 ‘Study with Me’ 영상도 있다.
‘GRWM’ 콘텐츠가 유튜브에 등장하기 시작한 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런 류의 영상과 그 안의 개인적인 감성은 장르의 짧은 반복 덕분에 계속 인기를 끌고 있으며, 점점 더 사생활을 드러내는 느낌을 준다.
유튜브의 어니스트 페티(Earnest Pettie) 문화&트렌드 리드(파트장급)는 이런 형식의 콘텐츠에 대해 “크리에이터에게 스토리텔링을 위한 수단이자 자신의 일상을 공유하는 핑계가 된다”고 설명한다.
시청 인구 수십억
일상 작업을 다룬 영상들은 유익한 정보를 찾거나 공감 콘텐츠를 찾거나 혹은 둘 다를 원하는 시청자들을 끌어 모으기 때문에, 유튜브 같은 동영상 플랫폼들이 제시하는 추천 콘텐츠에서 주요 메뉴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유튜브가 올해 8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발표 시점을 기준으로 제목에 ‘GRWM’을 변형한 형태의 제목을 내건 영상 조회수는 60억 회를 넘었다고 한다. 틱톡에서도 “GRWM” 해시태그가 포함된 영상들의 조회수를 다 더하면 1570억 회가 넘었다.
자신의 브랜드를 홍보하고 싶어서 또는 보그(Vogue) 잡지가 이런 트렌드를 반영해 만드는 ‘뷰티 시크릿(Beauty Secrets)’ 시리즈에 출연하게 되어서 등의 이유로 셀럽과 인플루언서들도 이런 흐름에 동참했다.
가수 라이오넬 리치의 막내딸이자 모델과 페션디자이너로 활동중인 소피아 리치가 올해 4월 자신의 결혼식 준비와 식이 진행되는 과정을 틱톡에 게시한 바 있다.
페티에 따르면 초창기에는 단순히 카메라 앞에서 화장을 하는 정도였던 GRWM 장르가 지금은 콘텐츠 크리에이터들이 몸치장을 하면서 생각나는 단상들을 팔로워들에게 스스럼없이 말하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틱톡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이용자가 방문하는 사이트가 된 2021년을 전후로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이 각각 쇼츠와 릴스라는 이름의 유사서비스를 런칭하면서 GRWM 유행은 다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인플루언서 에이전시 회사인 인플루언서마케팅팩토리의 니클라 바톨리(Nicla Bartoli) 영업 담당 부사장은 이 장르에 대해 “뭔가 특별한 방송 아이템 없이 영상을 공유하는 것이 아직 불편한 신진 크리에이터들이 주로 채택한다”고 설명했다.
이런 유형의 영상이 올라오면 해당 채널의 콘텐츠가 덜 무겁고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되는 경향이 있으며, 이런 경향은 그 크리에이터를 처음 보지만 그의 활동 주제에는 관심이 있는 시청자들에게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한다.
시청자가 많아지고 인기가 높아지면 브랜드 협찬 또는 기타 수단으로 비용을 지불하는 회사와의 파트너십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틱톡에서 스크롤은 매우 빠르게 이뤄지는 만큼 크리에이터는 사용자들이 다음 항목으로 이동하기 전에 관심을 붙잡아야만 한다.
인플루언서들과 제품 브랜드를 연결하는 업무를 하고 있다는 바톨리 부사장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뛰어들면서 경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매력적인 스토리의 수준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이 분야에 가장 유명한 인플루언서 중 한 명인 알릭스 얼(Alix Earle)이라는 틱톡커(팔로워 600만 명)는 자신의 여드름, 섭식장애, 공황발작 같은 힘든 경험 뿐 아니라 친구들과의 저녁 약속 같이 가벼운 분위기의 에피소드를 공유한다.
알리샤 레이(Alisha Rei)라는 틱톡커는 심지어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신발가게 교대 근무를 놓친 상황조차 소재로 삼아 ‘나와 함께 해고될 준비를 하세요(get ready with me to get fired)’라는 영상에 #pleasedontbelikeme(나처럼 되지 마세요) 태그를 달아 공유하기도 했다.(레이는 매니저로부터 경고만 받고 해고되지 않았지만 여러 언론사에서 이 사연을 기사로 보도하자 자신의 계정을 비공개로 전환한 상태다)
GRWM 영상들은 그 성격상 다양한 제품 사용이 개연성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크리에이터와 친밀감을 느끼는 시청자에게 오히려 공감 포인트가 될 수 있다. 소비자가 있는 곳에 광고를 넣고 싶은 상업 브랜드들로서는 PPL 광고를 집행할 대상으로 매력을 느끼게 되는 이유다.
이와 관련, 국제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올해 초 보고서에서 브랜드 파트너십이 크리에이터들에게 가장 큰 수입원이라면서, ‘크리에이터 이코노미’의 가치가 당시 시점 기준으로 2500억 달러에 달하고 2027년에는 그 규모가 대략 두 배로 늘어날 수 있다고 전망한 바 있다.